2008년 토정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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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의 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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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土亭秘訣)이란 그 해의 간지(干支)와 갑자·을축과 같이 다달이 배정된 월건(月建) 그리고 날의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숫자로 풀어 셈하여 그 해의 신수(身數)를 보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때부터 생겨났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년 신수(身數)를 보았다고 한다.
주로 연초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토정비결을 보기 위하여 역술인 들을 많이 찾아가는데 이를 봄으로써 한해가 지나가고 또 다른 한해를 맞이하면서 자신을 추스르며, 또한 가정의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요즈음에도 많이들 보고 있다.
토정비결은 주역(周易)의 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괘의 숫자라든가 몇 가지 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이중 첫 번째는 괘의 숫자가 48괘로 주역(周易)의 괘보다 16개가 적으며, 두 번째로는 괘를 만드는 방법도 년(年), 월(月), 일(日), 시(時)가 모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시(時)가 빠진다는 점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주역(周易)의 괘는 총 424개의 괘로 구성되어져 있는 반면에 토정비결은 144개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점이다. 즉, 토정비결은 시구 절과 같은 방식으로 쓰여져 있으며 이를 풀이하여 일년 열두 달의 신수(身數)를 보는 것으로 주역(周易)이라든지 다른 역학(易學)들과 마찬가지로 비교와 은유적인 표현으로 풀이하여 놓았으며, 길흉화복(吉凶禍福)의 표현자체가 사람들에게 활기 있게 하여주고 또한 힘을 북돋아주는 그러한 역할을 하여 선조의 서민층에서 더욱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토정비결) 일년운세를 봄으로써 올해의 길함을 득(得)함으로 잘 이끌고 흉함을 잘 다스려 흉함을 피할 수 있는 그러한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임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덧붙여 자신이 태어난 해(年)와 달(月), 날(日), 시(時)간을 기본으로 사주를 풀어나가며, 하루를 24(時)로 보고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四午未申酉戌亥)"의12시각으로 모두 144시각이라 했던 것이 토정비결의 원리이다.
자신의 정확한 생년월일시에 맞춰 풀이된 신수는 어쩌면 누구에게나 닥쳐오게 될 경고의 메시지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는 크나큰 위험이, 또 누구에게는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나에게 닥치게 될 올 한 해를 준비해 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세우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토정비결은 절대적 의미가 아니며 집착의 의미 또한 아닌, 나에게 있어서 미래의 발자취일 수 있다.
토정 이지함 |
본문 |
본관 한산(韓山). 자 형백(馨伯)·형중(馨仲). 호 수산(水山)·토정(土亭). 시호 문강(文康). 《토정비결(土亭 訣)》의 저자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우다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갔다.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6품직을 제수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다음 해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박순(朴淳)·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교유했으며, 당대의 일사(逸士) 조식(曺植)은 마포로 그를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포천 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 등에 피력되어 있는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이지함은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조선시대 도가적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도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김계휘(金繼輝)의 질문에 이이가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기인적 풍모를 대변해 주고 있다.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전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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